조선 시대의 교육기관 성 균 관
Ⅰ. 서론
< 성균관의 유래 >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인재양성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을 ‘태학’이나 ‘반궁’ ‘현관’ 또는 ‘근궁’ 이라고 하였으며 ‘수선지지’라고도 불리었다. 성균관의 기원을 살펴보면 고구려 시대의 태학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는 개경에 위치해서 이름을 국자감으로 불리었고, 갑오개혁 때인 1894년 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거듭났다. ‘성균’ 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298년 충렬왕 24년에 국학을 성균감으로 부르면서 부터이다. ‘성균’의 뜻은 주례의 ‘대 사악’ 에서 쓰이던 말로 ‘음악을 조율 하는 것처럼 흐트러짐 없이 바로잡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후 1308년 충선왕에 의하여 완전하게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성균관의 기틀을 잡은 것은 공민왕으로, 1362년에 기술계통의 학부인 율학, 산학, 서학 을 완전히 분리시켰으며 유학교육을 가르치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양과 개성에 있는 성균관은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한양천도로 인하여 개경에서 동북부지역의 숭 교 방 근처인 (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옆)명륜동에 자리를 잡는다. 태조4년인 1395년에 건물이 지어지기시작해서 3년 만에 대성전 과 동무, 서무, 의 문묘를 비롯해서 명륜당, 동재, 서재, 정 록 소, 식당, 양현고등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후에 성종 9년 1478년에는 도서관의 필수요소인 반수의 존경각과 반궁 제가 지어졌다.
성균관은 국가적인 교육단체이기 때문에 직책이 있는 관리들에 의하여 운영이 되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정 3품의 대사성한명, 종 3품의 좨주한명, 정 4품의 악정 2명, 정 5품의직강 한명, 정 6품의 전부가 1명, 정 7품의 박사가 2명, 종 7품의 순유박사가 2명, 정 8품의 진덕박사가 2명, 정 9품의 학정이 2명, 정 9품의 학록이 2명, 종 9품의 직학이 2명, 종 9품의 학유가 4명이 있으며 서리를 2명을 두고 있다.
성균관에 겸관인 지사와 동지사를 설치하여 2품 이상의 학덕이 높은 대신들 중에서 성균관제조 및 겸대사성을 주어 겸임을 하도록 하였다. 이후 태종1년인 1401년에는 직제를 좨주가 사성으로 개편이 되었고, 또한 악정이 사예로 되고 전부가 주부가 되는 개편을 한다.
성균관은 이후에도 세조12년 1466년에 직제를 대폭 개선정비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총원 수는 처음에는 150명이었지만 세종 11년인 1429년에는 200명으로 늘어났고, 유생들을 생원이나 진사로 입학한 상 재생 또는 상 사생 과 기재생이나 하재생의 유학생들로 반을 나누어 운영하였다. 한마디로 성균관은 관리후보자를 교육시켜 양성하는 기관임으로 유생이 될 수 있는 폭도 상당히 좁았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아침, 저녁 식사 때 마다 명부인 도기에 서명을 하여 원점을 얻었다. 이는 현시대의 출석체크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원점이 300점 이상인 유학생들에게는 관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의 탄생과 구성에 대하여 알아보았고 다음 본론으로 현재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구조와 내력에 대하여 알아보고 결론으로 감상평을 적는다.
Ⅱ. 본론
서울 종로구 혜화역 근처에 위치한 성균관서원을 목표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혜화역을 가기위해서는 전철을 1번 갈아타야한다. 내가 사는 곳 에서는 9호선이 목적지에 가장 쉽게 갈수 있는 전철 교통편이 어서 전철로 이동하려고 한다. 9호선 전철을 타기위해 신 논 현 역에 8분 만에 도착해서 다행히 매정거장 서는 일반전철이 아닌 급행 전철을 09시 56분에 탈수 있었다.
성균관을 찾아 가려면 한번을 환승해야 되는 위치에 있으므로 동작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10시 31분에 혜화역에 도착하여 커피한잔을 하고나서 성균관으로 출발하였고, 혜화역에서 성균관까지는 15분이 소용된다고 하니 걸어도 그렇게 멀지않은 거리이다.
성균관에 대하여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성균관은 문과 위주의 기관이면서 엄격한 입학규정이 있고 졸업 자체도 별다른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합격해야만 가능 했다.
이처럼 상당히 체계적인 교육기관이 과거에 있었던 것에 처음 놀랐고, 그 당시에 유생들 모두 국비로 공부를 가르쳤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성균관을 서울에 살면서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했고, 청년기 시절에 성균관대학교 안을 방문했어도 옆에 위치하고 있는 성균관은 자세히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목표를 가지고 가려니 왠지 어색해진다.
성균관을 답사하기 전에 미리 사전지식을 습득해놓고 가는 길이라 그나마 자신감은 조금 생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해서 살펴보니 성균관 서원이 성균관대학교입구 우측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본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성균관 대학교의 초입 좌측에 있는 17번‘탕평비각’을 잠시 살펴보았다. ‘탕평 비’는 조선시대의 ‘농대 석가 첨 비’ 의 형식을 가지고 있고, 밑 부분인 대좌가 장방형이며 윗부분의 비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탕평 비 옆에 하마비는 1413년인 태종 13년에 나무로 만든 표목을 시작으로 1519년인 중종 14년에 문묘 동구에 세워졌다.
하마비의 유래를 살펴보면 ‘모든 관리는 이곳을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한 다’ 는 것으로 1품 이하가 궐문에서 10보 거리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고 3품 이하는 20보에서 내려서 걸어야하며 7품 이하는 30보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마비는 아래 부분인 대좌에 복연이 있고 그 위에다 비신만 세웠다.
하마비까지 본 다음 성균관의 앞에 있는 전체관내도를 사진을 찍어 안내도로 사용하고자 하였고, 주차장 길로 깊숙이 들어가니 출입문이 보였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그곳에서 좌측으로 3번 건물인 ‘동무‘가보였고 그 앞으로는 큰 느티나무가 서있어서 운치를 더했다. ‘동무‘와 ’서무‘ 중간에 16번 ’묘정 비각’이 있는데 아래 부분인 대좌는 거북이로 되어있고 그 위에 비신을 얹었으며 맨 꼭대기의 비개석은 용틀임형상을 한 화려한 모습이다.
구조는 외부가 기둥의 치수를 뺀 가로세로 약 3미터 90센 치에 이르는 사각형의 작은 전각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내부에 비석을 세우고 있는데 한마디로 거북이등위에 비석이 있는 생김모양이다. ‘동무’의 맞은편에는 4번‘서무’가 위치해있고 ‘동무’와 같은 대략 가로 58걸음에 세로 9걸음의 크기가 같은 모양이다. 제례 등을 이용할 때 쓰던 문을 ‘삼문’이 라고 하는데, 대성전인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정문 출입구인 5번 ‘삼문’이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문으로 들어가려다가 잠겨져있어서 실패하고 돌아서서 동무와 동재 사이의 층계위에 있는 출입구로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이동했다. 들어와서 보니 삼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서무’와 ‘동무’가 있고 가운데에 ‘묘정 비각’이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중앙에 좌우로 멋들어진 향나무가 지켜주듯이 있는 2번 ‘대성전’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1601년 선조34년에 지은 ‘대성전’에는 공자나 맹자, 안자 및 자사 등 4대성인과 공자의 제자들인 10철과 송조6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명현18인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처음에는 성현들의 위패가 133명이었지만 현재는 39명의 위패만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대성전’의 좌우로는 오래된 향나무가 서있어서 그런지 운치를 더해주고 있고 처마를 바치고 있는 기둥이 5개로 웅장함도 느껴진다. 특이한 것은 건물이 뒤쪽은 높이가 1미터43센 치이고 앞쪽은 1미터 62센 치의 5단으로 된 돌을 쌓아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여기서 잠간 성균관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야 할 것이 ‘동무’나 ‘서무’ 등 제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곳을 ‘대성전 구역’ 이라고 하며, ‘명륜당’을 포함하여 ‘동재’나 ‘서재’를 비롯한 교육을 하기위한 건물은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대성전’을 옆으로 하고 돌아가면 12번 제사 그릇을 보관하던 ‘제기고‘와 하급관리들이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 하급 관청인 13번 ‘수복청‘이 있고 그 옆으로 제사 음식을 차리는 14번’전사청’과함께 3개의건물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대성전’을 뒤로하고 들어서면 중앙에 19번 ‘서울 문묘 은행나무’가 노랗게 단풍이 들어 화려하게 들어서있고 좌측으로 기숙사 공간인 7번 ‘서재’가 있으며 우측으로6번 ‘동재‘가 있다. 은행나무는 용문사의 거대한 은행나무보다 규모가 좀 작지만 나름대로 크고 웅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가을이라 그런지 은행나무가 완전히 노랗게 물들은 상태로 하늘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여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동재’뒤쪽으로 ’진사 식당‘이 있고 ’진사 식당‘을 들어서기 전에 출입문 앞으로 나라의 임금이 성균관에 오셨을 때 타고 왔던 가마를 내려놓는 곳인 18번 ’하‘연대‘가 있다. 처음 ’성균관‘을 답사하면서 출입구 층계를 올라와 우측으로 보였던 것이 바로 ’하연 대‘ 이었던 것이다.
‘대성전’을 뒤로하고 서있는 모습의 위치에서 좌우로 ’서재‘와 ’동재‘가 있으며 가운데 1번 ’명륜당‘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과제물을 작성하면서 많이들 기록 할 것 같은데, 나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천 원짜리 지폐에 ’명륜당‘이 새겨져있다는 것을 엄청난 걸 발견 하듯이 적어본다.
1606년 선조 39년에 지어진 ’명륜당‘은 중당과 양옆의 익실로 구분된다. 중당은 사람인자모양을 닮은 맞배지붕 이고 익실은 팔작지붕형태이며 중당보다는 약간 낮은 형상이다.
’명륜당‘은 중당이 대략 가로 21걸음에 세로 7걸음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 익실은 가로 15걸음에 세로 7걸음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명륜당‘을 뒤로하고 성균관 유생들의 도서관이며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8번 ’존경각‘과 대사례에 사용되는 궁시나 웅 후 및 미후 등을 보관하는 9번 ’육 일각‘이 있다. 그리고 그 뒤 끝으로 1474년 대사성인 성현이 나라의 왕에게 건의 하여 지은 10번’향관청‘이 있다. ’향관청‘은 문묘나 향사의 제례가 있을 때 제를 행하는 제 집사 들이 함께 묵으면서 심신을 단정히 하는 곳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명륜당’과 ‘서재’사이로 나가서 출입구로 들어서니 나라의 왕이 직접 참관하여 과거를 치렀던 제2시험장소인 15번’비천 당‘이 보였다. 비천 당은 대사성인 민정중이 왕에게 건의 하여 지어졌고 중앙의 정청과 좌우 협실이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모두 25칸으로 되어있다.
비천 당은 ’비천대유‘ 라는 말 에서 인용이 되었고 수백 년의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6.25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1946년 이후에 잠깐 동안 비천 당을 정청은 성균관대학교의 대학본부로 사용되었고 협실은 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후 ‘비천 당’은 1988년에 건평 184.4㎡로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비천 당 주변 모습은 계절이 10월인 가을이라 그런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빨갛게 물 들은 단풍나무와 어우러져서 너무 멋있게 보인다. 비천 당의 크기는 남자걸음으로 전체 길이가 앞쪽이 대략 22걸음 이였고 옆쪽이 16걸음 정도의 건물이었다. 우리나라의 고풍격인 건물의 모양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단풍이 곱게 들은 비천당의 주변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천 당’을 둘러 보고나면 오늘의 여정이 끝이 나기 때문에 나도 잠시 푸른 하늘을 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Ⅲ. 결론
성균관서원은 예전에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잠간 들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그때는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기억에 남았던 것이 별로 없었다.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 ‘성균관’이 있던 장소도 잊고 살았었는데 이번에 한국방송대학교의 과제물로 숙제를 하려다 보니 뜻밖의 방문을 하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무리가 되는 나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어느덧4학년이 되면서 자부심과 긍정 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유서 깊은 성균관을 방문하려는데 기초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자료도 수집해보았다. ‘성균관’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다보니 내가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공부를 하면서 잊고 지내던 것을 다시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 아닌가싶다. ‘성균관’을 방문하면서 성균관 대학교 입구에 있는 하마비를 보면서도 느낌이 묘했다. 예전에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외우곤 했었는데 이렇게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성균관서원 안을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곳이 ‘비천 당’ 이었는데 넓은 앞마당을 가지고 있는 ‘비천 당’을 마주하고 서있으면서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하늘은 상당히 푸르렀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려는 듯이 단풍나무마다 울긋불긋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추억을 만들어 가려고 하려는지 여기저기 사진을 촬영하느라고 분주하다.
비천 당에서 바라보면 성균관 대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들도 보이는데 길옆으로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상당히 운치 있는 등교 길이 될 것 같다.
현재는 전 국민이 코로나로 인하여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만해도 식당을 들려 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지인들과도 만나지 못하고 회사에서 집으로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위 드 코로나 정책을 펼치며 민생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 하고자 하고 있지만 이미 파괴되고 사라진 민생들의 자리는 돌아올 수 가없다. 그리고 여전히 코로나바이러스의 환진 자는 줄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과제물을 핑계 삼아 밖으로 외출을 나와서 ‘성균관’을 방문하였으니 내심 얼마나 기쁠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균관의 대성전을 관찰하고 명륜당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를 보면서 사진을 촬영하는데 저절로 웃음이 입가에 맺힌다. 같이 동행한 나의 아내도 즐거운지 연신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다.
오늘의 탐방은 아내와 의 외출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나 할 정도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퇴색해진 국민들의 정서가 무척 걱정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해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가는 것 같다. 성균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이 벌써 1시가 넘었다.
10시50분쯤 도착 한 것 같은데, 그렇게 넓은 곳도 아닌 곳을 우리가 만끽하고 있었나보다.
성균관 대학교를 나오면 40년 전에도 먹자골목이 있었는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한번 가보기로 했다. 식당은 학생들을 위주로 해서 그런지 가격 면이나 음식의 맛이 상당히 좋았던 걸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그런 가 골목이 한산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먹자골목을 내려오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섰는데 주꾸미를 재료로 하는 식당이며 안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처럼만에 오랫동안 걸어 다녀서 피곤을 풀고자 안쪽에 다리를 펴고 않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요리를 시켰다.
모처럼 만의 외출이라 소주도 한 병 시켰는데 낮술이라 그런지 몹시 취하는 것이 기분은 최고였다. 만약 학교에서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집에서 할 일없이 뒹굴고 있을 시간인데 너무나 많은 고마움을 느끼며 최고의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서는데 큰 길 쪽이 유명한 대학로로 20대 때에 자주 와서 놀던 곳이기도 하다.
대학로와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이 식당에 길게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서 역시 젊은이들의 성지라고 할만 했다. 우리가 성균관 대학교의 먹자골목에서 조금만 더 나왔으면 식사도 못할 뻔 했다. 대학로로 들어서서 조금 더 종로 쪽으로 내려오면 한국방송 통신 대학교 본 대학이 위치해있다. 상당히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고 일반 다른 대학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고풍적인 대학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일이 있을지 몰라서 우리는 열심히 사진으로 추억을 담았다. 이렇게 모처럼의 외출을 즐겁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우리나라의 국민들도 코로나를 이기기위해서 어떤 계기가 생길 수 있도록 환경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균관의 탐방을 마친다.
< 참고문헌 >
- 송찬섭 외,『한국문화와유물유적』,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2020.
-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관.
- 성균관 답사.